오유 사이다 레전드 - 비범했던 그 양반 (완결) 초스압

간혹가다가 오유에는 필력 쩌시는 분들이 명작을 남기시네요 ㅋㅋㅋ 

좀 길어도 읽을 맛 납니다 ㅋㅋㅋ



며칠 전 이상한 중년 남자가 우리 고시원에 입주했다.


주방에서 순두부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갑자기 내 곁에 와 그 찌개를 가리키고는


“야 이거 핫핫이야. 이거 매워 핫핫. 영어 몰라? 핫핫. 허 참. 이건 영어도 못하네.”라는 말을 과장된 손짓과  함께 건넸던 사람이었다.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외국인은 아닌지라


“한국인인데요.”라고 말하자 그 양반은 “어휴. 키가 커서 외국인인 줄 알았어.”랬다.


지난 4년간 이 고시원에서 각종 전과자, 수배자들부터, 복도에서 과일을 찾는다며 칼을 들고 돌아다녔던 노인, 자신이 미군 중령이라고 주장했던 허언증 환자에 이르기까지 범상치 않은 여러 사람들을 봐왔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온 경험은 내게 ‘이 양반은 되도록 가까이해서는 안 될, 아주 비범한 양반’이라 조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그 양반은 자신이 고려대 평생교육원에 초빙된 미술 강사라며 “앞으로 만두나 담배 좀 있으면 나도 좀 주고 그래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비범한 면모를 과시했다.


이후로 그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외국인들을 볼 때마다 영어?로 말을 걸어댔다. 행여나 무슨 사건이라도 날까 하여 그 대화를 유심히 들어봤으나 도통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거는 말이라는 게, 복도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베트남 친구를 뜬금없이 불러 세워선


“야! 유! 가이드! 미! 룸!”이라고 외치고는 그 친구가 벙 찐 표정을 지으면 “너는 영어도 못하고 한국어도 못해서 여기서 어떻게 사냐?”며 고개를 내젓는 식이었다. 참고로 그 베트남 친구는 영어할 줄 안다. 한국어도 잘 한다.


고시원 터줏대감들은 첫날부터 모두들 그 양반의 비범함을 느끼고 그에게서 거리를 뒀다. 그때까진 그는 조금 독특하지만 몇 주 뒤면 자연스레 고시원의 일부가 될 그럴 사람이었다. 일요일 아침, 1호실 아저씨의 방문이 열리기 전까진 그랬다.


우리 고시원에는 날 포함해 6명의 장기 거주자들이 있다. 고시원 장기 거주자들은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가량 이 고시원에서 지낸 이들로서, 이들 사이에는 생활을 공유한 만큼의 세월 동안 쌓인 감정적 앙금과 사건들이 자연스레 끼어 있었다.


예컨대 1호실 아저씨는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서 끓이던 라면을 술김에 훔쳐 먹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2호실 아저씨는 3호실 아저씨의 슬리퍼를 계속 훔쳐 신다가 무좀을 옮긴 일이 있었다. 3호실 아저씨는 4호실 아저씨에게 화장실 문을 안 닫고 볼 일을 본다며 면박을 주다가 주먹에 얻어맞은 적이 있고, 4호실 아저씨는 술에 무척 취해서는 복도에 벌거벗고 잠들어서 민폐를 끼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나 역시 이 고시원의 정글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다소간 민폐를 끼친 적이 없지는 않은지라, 그들 중 몇몇과는 퍽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양반이 사흘간 남긴 전설적인 행보는 세월의 앙금을 깨부수고 우리 고시원 장기 거주자들을 한 데 묶는 위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전술한 바처럼 그 양반이 자신의 비범함을 발휘한 첫 번째 행보는 1호실 아저씨의 방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됐다. 1호실 아저씨는 따뜻한 전기장판 위 이불 속에 드러누워, 아침의 찬 공기와 일요일의 게으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1호실의 방문을 갑자기 열었다. 그 비범한 양반이었다.


그 양반은 “어이쿠 미안 여기 사람이 있었네? 쏘리. 쏘리!”라고 말하고선 1호 아저씨의 방을 쭉 훑어봤다. “당신 뭐야!”라는 1호실 아저씨의 외침에 그 양반은 “미안. 쏘리! 야! 쏘리! 응? 나중에 올게”하고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1호실 아저씨는 그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왜 남의 방을 함부로 열어보느냐며 욕지거리를 끊임없이 뱉어냈고 그 비범한 양반은 “이 무식한 놈아! 너 영어는 아냐? 쏘리! 그거도 모르냐!”며 응수했다.


재작년, 한밤중에 어떤 노인이 바지 지퍼를 내리면서 1호 아저씨의 방에 난입했던 사건 이래로 1호실 아저씨가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술에 취한 노인이 1호실 아저씨의 방의 용도를 화장실로 바꿔놓았던 그 사건만큼은 아니었지만, 퍽 재밌는 사건이기도 하고, 잘하면 1호실 아저씨와 비범한 양반의 주먹다짐을 구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척하면서 내 방문을 나섰다.


실수였다.


굳게 닫혀 있는 1호실의 문과,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는 그 비범한 양반의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스스로를 그 양반이 서성거리고 있는 복도에 내던졌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 어두운 복도, 그 맞은편에서 그 양반이 쓰고 있는 보랏빛 선글라스 너머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타인의 불행은 애석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애석한 이야기가, 나를 그의 등장인물로 삼고자 다가온다면 그것은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대처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보랏빛 선글라스 너머 그 양반의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음이 확실해졌을 때, 나는 1호실 아저씨가 일요일 아침 겪어야 했던 일에 대한 심심한 유감을 접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 양반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를 무시하고 옥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에겐 이 고시원의 불문율은 퍽 편리한 점이 있다. 별다른 용건 없이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든가, 누군가를 불러 세우는 일이 금기시된다는 점에서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고, 동시에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그 불문율이 그 양반의 관심으로부터 날 보호해주길 바라며 나는 천장으로 시선을 향한 채 옥상의 흡연 장소로 향했다.


‘터벅… 터벅…’


등 뒤로 들려오는 그 양반의 발걸음 소리는 내 바람이 배신당했음을 알려줬다. ‘터벅’ 하는 내 보조에 맞춰 들리는 ‘터벅’ 하는 그의 발걸음 소리로 그의 목표가 정확히 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양반은 내 등을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고시원의 옥상은, 그곳으로 향한 길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더 이상 향할 곳이 없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탁 트여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이다. 나는 부디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만은 없길 바라며, 담뱃불을 붙여 하늘에 구름 한 모금을 불어넣었다. 가벼운 바람 한 줌이 내가 불어넣은 담배 연기를 몇 조각으로 찢는 게 보였다.


“저기요. 학생, 나도 담배 한 개비만 좀 줄 수 있어요?”


내 바람도 잘게 찢겼다. 그 양반답지 않은 퍽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양반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하지만 않으면 나에게 관심을 곧 끊겠지…’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그는 대단히 반갑게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라이터는?”이라 물었다. 그 양반은 졸지에 담뱃불까지 조공하게 된 나를 보며, 이 관계를 젊잖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손윗사람과 그에 공손히 응하는 손아랫사람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이내 그 양반은 손윗사람으로서 체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애써 무시하는 티를 드러내는 나에게 자신이 왜 1호실의 문을 열게 됐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주방에서 1호실 아저씨가 김칫국을 끓이는 모습을 봤댄다. 신김치를 넣은 김칫국 냄새가 맘에 들어서 ‘뭐 넣고 끓이나’ 한번 봤댄다. 김치뿐이었댄다. 나이 쉰은 먹었을 법한 1호실 아저씨가 추운 겨울날 그래도 따뜻한 국 한 그릇 먹어보고 싶어서, 물 한 됫박에 김치 몇 조각 넣어 끓이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댄다. 자기도 없는 살림이지만 그래도 냉장고에 남은 콩나물이라도 한 봉지 좀 줄까 해서 그 방에 찾아간 거였는데, 너무 역정을 내기에 당황스러워서 그랬댄다.


하기야 요즘 1호실 아저씨가 일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겨울이면 이 고시원 사람들의 일감은 자주 끊긴다. 더러 월세가 밀려 내쫒기는 이들이 생기곤 한다. ‘1호실 아저씨가 고기를 언제 구웠던가?’ 기억을 더듬어봤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 김치도 필시 고시원 원장에게 사정 몇 마디 해서 구박 몇 마디와 함께 얻어온 것일 게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맘이 안쓰러웠다.

그 양반은 받아든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선, “너도 나중에 1호실 아저씨한테 좀 잘 좀 해드려라”며 계단을 따라 자기 방으로 향했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더 태우고서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하늘은 맑고 겨울 공기가 쌀쌀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 양반은 그날 1호실 아저씨의 김치찌개를 훔쳐 먹다가 걸렸다. 그렇게 그 겨울 기나긴 사흘의 첫째 날이 지나갔다.


주방은 이 고시원의 정글적인 속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공간이다. 그곳엔 성문화된 어떤 규칙도 없지만 오랜 기간 걸쳐 먹잇감들을 두고 발생한 긴장과 싸움 끝에 생긴 관례들이 그곳의 안정을 담보한다.


관례는 나약한 규칙이다. 그렇기에 어떤 관례가 오랫동안 지켜졌다는 것은 그 관례를 수호하는 이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방증이 된다. 2호실 아저씨는 주방의 위대한 수호자였다. 공용 냉장고에 가장 많은 식량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방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2호실의 지리적 이점과 어우러져, 2호실 아저씨가 스스로를 사실상 주방의 관리인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고시원 원장이 사실상 관리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던 이곳 5층에서, 주방을 전담 관리하는 이의 존재는 여러 거주자들의 편리에도 상응했으므로, 고시원 장기거주자들은 주방에서의 2호실 아저씨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서 도맡은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밥을 짓는 일이었다. 고시원 관리자가 사실상 관리를 포기한 이곳 5층의 공용 밥솥은 곧잘 비곤했다. 식대 한 푼이 아쉬운 고시원 입주자들에게 텅 빈 공용 밥솥은 그야말로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참사였다. 2호실 아저씨는 공용 밥솥이 빌 때마다 관리실에 내려가서 쌀을 받아와서 직접 밥을 짓곤 했다. 밥 안치는 솜씨도 퍽 훌륭했다.


월요일 새벽,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기 위해 2호실 아저씨는 평소처럼 관리실에서 쌀을 얻어와 밥을 안쳐놓고 출근 준비를 마쳤댄다. 취사가 끝날 무렵 2호실 아저씨는 자기 몫의 밥을 덜어가기 위해 밥솥을 열었다.


텅 비어있었다. 밥솥에 안쳐놓은 밥을 누군가 모조리 덜어 가버린 것이다. 가을 내 열심히 모아놓았던 도토리 창고를 털린 다람쥐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한 겨울을 그 창고를 의지해 든든히 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고스란히 상실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호실 아저씨가 쌀 얻어오고 밥을 지은 노고는 유난히 서러운 공복감을 안고 막일을 해야 하는 슬픈 아침으로 돌아왔댄다.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서 도맡아 했던 두 번째 일은 주방 청소였다. 주방 바로 앞에 위치한 2호실의 특성상 주방에서 풍기는 음식냄새가 곧 2호실 아저씨의 체취가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2호실 아저씨는 자신의 필요와 공공의 복리라는 명분을 동력 삼아 주방 청소와 관리에 매진했다.


그가 일을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방문 앞 건너편에 보이는 주방의 모습은 처참했다. 깨진 계란 껍데기는, 가스랜지 위에 눌러 붙은 계란 흰자 옆에 놓여 있었고 기름때가 잔뜩 묻은 프라이팬과 접시, 수저는 식탁 위에 고스란히 얹혀 식탁보를 기름으로 불들이고 있었다. 몇 점의 김치 쪼가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 곁엔 장조림 소스들이 꽈리고치 몇 개와 함께 버려져 있었다.


더러워진 주방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2호실 아저씨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그 식기들, 계란들, 김치와 장조림이 모두 2호실 아저씨가 주방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2호실 아저씨는 서둘러 공용 냉장고를 열어봤다. 김치는 통째로 사라졌고 장조림은 꽈리고추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어묵볶음도 절반가량이 사라져 있었다. 밥솥은 볼 것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지라 그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2호실 아저씨의 표정은 아마도 성난 야차 같았을 것이다.


2호실 아저씨는 곧바로 그 양반의 방문을 두드렸다. 입주 첫날부터 1호실 아저씨의 김치찌개를 훔쳐 먹었던 그 양반을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사고였을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가 그랬지? 내놔 내 거 내놔! 문 열어봐!”


그 양반의 방문은 잠긴 채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시원 5층 출입구에 아무렇게나 내동쳐 있는 그 양반의 화려한 갈색구두는 그 양반이 고시원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2호실 아저씨는 더 성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2호실 아저씨는 10분가량을 더 문을 두들기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하지만 그 방엔 역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다른 사람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갔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저러다가 문이 정말 부서지겠다는 생각이 들 때를 즈음해서 고시원 관리자가 올라왔다.


관리자 할머니는 아직 월세를 받아내지도 못한 그 양반을 다른 입주자들이 괴롭힌다는 사실에 다소 거북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황을 들어 보니 의심이 충분히 들 법도 한 것 같았다. 관리자 할머니는 “그럼 내가 문 따 줄게 한번 봐봐. 괜한 문 고장 내지 말고”라며 관리실에서 열쇄를 가져와 그 양반의 방문을 땄다.


방 안에선 자는 척 하는 그 양반이 있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양반이 “뭐야 자는데! 들어오지 마!”라고 말했으니 대단히 쉽게 잠에서 깨는 게 아니라면 자는 척 하던 것이었을 게다.


그 양반은 저 사람이 나를 마구 모함한다며 나는 그냥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잤노라 주장했다. 관리자 할머니가 그러면 2호실 아저씨의 반찬들이 혹 방에 있는지 확인하게끔 방을 좀 보여주면 될 것 아니냐 물었다. 그 양반은 당당하게 “그래! 들어와서 봐! 보고 그거 없으면 한번 봐봐! 내가 이거 경찰에 신고할 거야!”랬다. 그 태도가 퍽 의연해보였다. 2호실 아저씨도 그런 태도에 내심 당황했을 것이다.


과거 1호실 아저씨도 2호실 아저씨의 라면을 훔쳐 먹었던 일도 있었고, 사실 주방에서 누군가가 반찬을 훔쳐 먹는 일은 더러 일어나는 일이다. 그제야 2호실 아저씨는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그 양반을 범인으로 단정 지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양반의 침대 밑에서 김치 한 통과 메추리알,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간 장조림 한 통이 나왔다. 한 가득 담긴 밥은 아예 대놓고 책상 위에 있었다. 없어진 줄도 몰랐던 수저 한 쌍도 나왔다. 큰 통의 절반 정도가 사라졌던 어묵볶음은 안 나왔다. 참고로 2호실 아저씨의 밑반찬 솜씨가 퍽 괜찮았다. 그 어묵볶음이 참 맛있었던 걸로 봐서 그러했다. 2호실 아저씨 미안해요. 관리자 할머니가 다들 맛 좀 보라고 넣어둔 반찬인 줄 알았어요. 어쩐지 어묵볶음에 멸치도 들어가 있더라니


2호실 아저씨와 그의 밑반찬들이 재회하면서 그 겨울, 사흘의 이튿날이 지나갔다.


'이제 끝장이다' 싶었을 때, 기대치 않았던 안전망에 몸을 의탁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안전망에 몸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이 다음은 정말 나락’이라는 위기감을 자극한다. 그 안전망이 부실하면 부실할수록 그 위기감은 더욱 커진다. 안전망에 떨어진 사람들은 언젠간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탈출하든 나락으로 떨어지든 결국 벗어나게 되기 마련이다.


월세 17만 원에 숙박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으며, 보증금이 없으면서도 한 두 달 정도는 월세가 밀려도 쫒아내진 않는 이곳은 나 같은 주거 빈곤층에겐 그야말로 안전망 같은 장소였다. 나를 비롯한 6명의 장기 거주자들을 예외로 한다면, 이곳 고시원으로 떨어진 이들은 다들 제각기의 방법과 방향으로 고시원을 이내 벗어났다.


운 좋은 이들 몇몇은 원룸으로 탈출하기도 했고, 애석한 이들 몇몇은 축 늘어진 채 들것 가마에 모셔져 나가기도 했다. 지난 4년간 퍽 인상 깊은 방식으로 고시원을 떠난 이들은 여럿 있었으나, 그 어떤 이도 그날 그 양반만큼 비범한 방법으로 이곳 고시원을 벗어난 이는 없었다.



그 양반은 그 짧은 시간만에 고시원의 악명 높은 유명 인사가 됐다. 흡연 장소에서, 주방에서, 고시원 주민들의 대화 속에 그 양반이 등장하는 일이 무척 잦아졌다. 그 양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1호실과 2호실 아저씨는 그 양반이 고시원에 가져온 폐해를 알리는 데 특히 열성적이었다.


그 양반도 그런 기류를 느끼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2호실 아저씨의 식기와 반찬을 훔쳐간 사건 이후로 그는 하루 종일 농성하듯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관리자 할머니의 비아냥대는 말 몇 마디를 얻어 듣는 걸로 봐서 아직 고시원 월세도 내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고시원 주민들 모두가 그를 싫어했고 월세도 제때 내지 않은 이상 관리자 할머니도 그의 편이 될 리 만무했다. 모두들 그가 한 달을 채우면 곧바로 이 고시원을 떠나리라 생각했기에 1호실 아저씨도, 2호실 아저씨도 더 이상 그의 퇴거를 종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일 없던 사흘이 지나가고 나흘이 되어가는 새벽 네 시 무렵이었다. 복도가 무척 소란스러웠다. 5호실과 1호실, 2호실 아저씨들이 무어라 소리치며 누군가의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새벽 다섯 시 즈음 출근 준비를 하는 이들이 많은 이 고시원에서 새벽 네 시는 가장 고요한 시간이었다. 1년 전 즈음, 세 달치 월세가 밀려 쫓겨났다가 새벽 중에 몰래 고시원에 다시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근 뒤, 내부에 잠금 장치를 덧대서 사흘 가까이 농성했던 이상한 청년을 강제 퇴거시켰을 때를 제외한다면,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란을 부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벽 중에 깼다는 짜증스러움보단 흥미가 일었다. 하루 종일 대화라곤 몇 마디도 들을 일 없던 고시원에서 여러 사람들이 고함치고 있는 상황에 호기심이 동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싫어하는 이들끼리 싸우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천박한 기대가 일었다. 하지만 너무 졸렸다. 나랑 친한 편인 5호실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었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금 잠들었다.


다음날 오후, 출근 준비를 하는 5호실 아저씨한테 어제 새벽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다. 5호실 아저씨는 “어, 미안 어제 시끄러웠지” 사과하고는 어제 새벽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한밤중에 일을 하는 5호실은 그날 일을 좀 일찍 마치고 새벽 세 시 즈음 고시원에 돌아왔다. 방에 짐을 풀고 샤워실에서 씻고 와보니 방안에 둔 핸드폰이 사라졌다. 혹시 화장실에 놓고 왔나 샤워실에 놓고 왔나 주방에 놓고 왔나 돌아다니며 찾아봐도 나오질 않았다. 화장실 가러 나온 2호실 아저씨를 만나 핸드폰을 빌리려고 보니 2호실 아저씨도 핸드폰을 잃어버렸댄다.


5호실 아저씨는 1호실 아저씨를 깨워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걸어봤다. 그 양반의 방 방향에서 이내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그 양반의 방문을 두들겼다. 인기척이 없기에 그들은 관리자 할머니를 깨워 사정을 설명하고는 방 열쇄를 받아들고 왔다. 그 양반이 문 밖에 나와 있었다.


그 양반은 또 미국말을 쏟아내며 왜 밤중에 남의 방문을 두들겼느냐고 그들을 쏘아붙였다.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하니 그 양반은 왜 또 자길 도둑으로 모냐며 역정을 냈다.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그런 일 없댔다. 다시 전화 해보니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폭력을 통해 상호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1호실 아저씨가 퍽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댄다.


그때였다. 그 양반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새벽 중에 자기 방문을 두들기고 이젠 자기까지 두들기려 한다'며 그들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왔다. 경찰은 분실물이 방 안에 있는지는 확인해야겠다며 그 양반의 방 안을 살폈다. 침대 밑에서 열 대 가량돼 보이는 핸드폰들이 나왔다. 없어진 줄도 몰랐던 5호실 아저씨의 지갑과 어떤 성신여대생의 지갑 그리고 공용 냉장고에서 사라진 반찬들도 나왔다.


그 양반은 자신이 부른 경찰관의 세심한 인도 속에서 그날 그렇게 고시원을 떠났다. 퇴장도 등장 못잖게 퍽 비범했던 양반이었다.


( 완 ) 


Ps. 이거 실화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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